첫눈 오는 날의 역주행
가을이 채 추스르기도 전, 이맘때면 으레히 습관 된 연례처럼, 매서운 칼바람 점령군처럼 앞세워 가을 잔해 더미에 휘몰이를 시작으로, 삭막한 고독 감추련 듯, 헛헛한 설움에 소금절이를 하는 것처럼, 동토의 계절을 예고함과 함께, 새하얀 눈꽃 천국을 축조키 위한 첫눈이 사박사박 내리는 날이면, 당혹스러움과 아쉬움을 동반한 또 한 설렘을 못내 감추지 못한 채 깊숙히 몸을 움츠려 옷 속에 욱여넣고, 틈틈이 빼곡한 삶의 파편들을 조각 맞춤 하며 더듬더듬 숨가쁜 역주행을 시작해 갑니다. 무수한 갈색 추억 더미 무덤을 지나 아직 선혈이 낭자한 핏빛 능선을 넘어, 애절한 풀벌레 소리와 계절 전령사들의 우렁찬 곡소리가 한 낮 온밤을 주야장천 지새울 제, 거대한 폭풍우가 한여름 태양을 손아귀에 넣고 입 안에 왕사탕 굴리듯..
더보기
긴 기다림
뭔가를 그리려다 잠시 둔 파~란 캔버스처럼, 뭐라도 해 두지 않으면 혹여 얼룩이라도 질 것만 같은 티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가만히 집게손가락을 길게 펴 찍고 내 안의 그 이름을 꾹꾹 눌러 예쁘게 쓰곤, 불쑥 겨울을 몰고 온 찬바람에 행여 번짐이라도 생길세라, 핏빛 단풍잎 한 장 갈피표 하여 예삐 갈무리 하고, 풍성했던 초록잎 갈색 추억에 묻어 보내고 비우고 발가벗은 채로, 긴 기다림을 시작한 저 갈참나무처럼, 내 안의 서글픈 그리움 차마 지우지 못 하고, 나 만의 긴 기다림 못내 비우지 못한 채, 정해진 숙명처럼 쥐어 준 내 몫처럼, 돌아가는 그날까지 오롯이 간직하며, 이어 가렵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러했듯이 지난 해도 그 지난해도 그랬던 것처럼. 2023년 11월 11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