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 지척간에서 몰래 사랑을 키우며 살아오다 사랑하는 여인을 남겨두고 홀연히 서울 도심으로 도망치듯 삶을 옮겨와 형제처럼 가까웠던 친구한테 빌붙어 혹이 된 채로 낯설고 복잡한 도시에서 초라한 행색으로 모질고 힘든 시간을 견디며 살아 낸지 2년여------------------- 그 꿈에 그리던 여인을 서울로 불러 올리고 혼인식일랑 엄두를 못 내고서 어렵사리 장안동 지하셋방에 둥지를 틀고 나서야 비로소 집이란 개념이 현실성 있게 다가왔다. 친구와 둘이서 자취 생활을 하던 시절의 집이란 그저 숙박을 위한 단순개념의 집에 불과했었다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는 집이란 삶의 시작과 열정을 꿈꾸는 사랑의 보금자리 같은 것이였으며,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아이를 얻고 나서부터의 집이란 비로소 "우리"라고 하는 한 가족의 형성으로 희망을 가꾸고 꿈과 사랑을 실현해 가는 행복의 원천이었으며 명실상부한 삶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곳ㅡ 집이라는 그 곳에 무엇이 담겨지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를 달리하고 그 곳에 무엇을 품고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는가에 따라 삶의 품격과 격식이 좌우될 수 있으며 그것이 누구의 소유인가로 부터 삶의 질과 한 개인의 품격마저 달라보일 수 있다는 사실과 현실에 공감을 해 주신다면 새삼 이 집이라 하는것에 우린 얼마나 애착하고 집착하며 살고 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하니 어떠하랴? 그 내 집의 꿈을 이루기 위한 열망은 어쩜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리라. 그 집 마련을 위하여 평생을 수고하며 집의 노예가 되어버린 채 서글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더 큰집 더 좋은 집을 선망하며 내집 마련에 목숨 걸고 안간힘 쓰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재산을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 되어 수십채의 집을 곳곳에 보유하고 있으면서 멋스럽고 고급스럽기만 한 집에 돈을 쳐바르기도 하고, 오히려 더 많은 집들을 사들이기도 하다가 다시 팔아치우기도 하는 이상한 나라 사람들도 있다는 현실엔 그저 씁쓸하고 먹먹한 가슴에 주먹질만 해댈 뿐, 발버둥을 쳐봐도 요원하기만 하고 집 없는 설움에 그것으로 인한 인격마저 도매금으로 빈티취급을 받을 때면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것에 원망을 품으며 신세를 한탄해 본적도 있었지들 않았던가? 그렇게 시작한 우리 부부에게도 집이란 숙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예외가 될 수 만은 없었으리라. 공기 탁하고 어두컴컴한 지하 방으로 부터 한시바삐 조금이라도 더 나은 주거환경을 갖추기 위해 안 먹고 안 쓰기를 생활화 하고 조금씩 조금씩 주머니를 부풀려가며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시절, 물려받은 것 없고 갖추지 못한 대다수 서민들의 삶이 다 그러하듯이 우리 부부의 삶 또한 힘겹고 치열하기는 그들 못지 않았으리라 싶다. 아내의 검소하고 부지런한 생활력이 알뜰하고 빈틈없는 살림살이로 겨우 버텨내며 장안동에서 답십리를 전전긍긍 하는사이 귀엽고 복스러운 둘째 아이를 낳고 보니 방을 넓혀가야만 하는 부득이한 처지가 되어있었다. 둘째 아이를 업고 딸아이를 걸리며 방을 구하러 다닌답시고 발품을 팔고다니는 아내의 딱한 처지에 두 아이가 천덕꾸러기로 보였었던지 서글프게도 귀염받아 마땅할 두 아이가 이유아닌 이유가 되어 가는 곳 마다 자꾸만 경계와 거부를 받게 되자 아내는 마침내 결심한 듯 일을 벌리기 시작했었다. 그땐 어린 아이들이 식구로 달려있으면 설움아닌 설움을 톡톡히 받는 시대였던지라 없는 형편에 마음에 딱 드는 집을 선택해서 가기란 주머니 사정이 허락지를 못했었고 그나마 내키지 않은 곳이지만 그 선택의 폭에 제약이 생김을 서럽게 인식한 아내가 마침내 답십리 민둥산 산꼭대기 전세 300만원 집에서 겨우겨우 연명하며 살던 가난쟁이 아내란 사실을 망각해 버린 듯 산동네 아랫 마을에 새마을 시장주변과 길 건너 학교 주변일대 까지를 넘보며 집을 사버리겠다고 으름짱을 놓고 들쑤시며 다니는데 내 형편이 미안스럽고 부끄럽고 난처하기 짝이 없던 처지였던 터라 하도 어이가 없고 짜증스러운 나머지 하루는 “뭘갖고 집을 사겠다며 그 난리를 치고다녀?”라고 핀잔스럽게 말하는 내게 대꾸도 하지않은 채 자기 일만 묵묵히 하곤하던 아내가 가끔은 퇴근하여 들어오는 나를 이끌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휩쓸고 다니며 남의집 구경시켜주기에 열을 올리며 다니기를 반복하더니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만 결국 어느날 억척스런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게 아주 멋진 결정타를 날리고 말았다. “여보 나 5십만원에 우리집 샀다!!”~ “빨리 퇴근해 와서 우리집 한번 바봐바!!”~ 직장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온 아내의 들뜬 수화기 음에 “뜬금없이 뭔소리야?” “각시가 5십만원에 집을 샀다면 난 젠즉에 호텔을 사고도 남았겠다!!”~ 라며 장난스럽게 대꾸를 하자 “아니여!!~ 나 시방 참말이여!!”~ “일단 퇴근하면 곧바로 들어와!!”~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아내의 음성에 잔뜩 눈물이 배어 있음을 느낀다. 집 없는 설움을 털어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기쁨에 찬 아내 음성이 이내 떨림처럼 귓전을 맴돌자 설마설마 반신반의 하면서도 장난인줄 알았던 가슴이 이내 울컥하며 코끝이 찡해져서 얼른 사무실을 벗어나와 마음을 진정하고 궁금증에 하루를 건성으로 보내다 이내 서둘러 퇴근길을 재촉한다.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오르막 골목길을 헉헉대고 뛰어오른 끝에 쪽 대문을 벌컥 열고 귀퉁이 문칸방 방문을 열어 제치면서 “각시!!”~ “뭔집이여?” “5십만원은 웬 것이고?” 라고 급하게 묻자 웃음가득 띈 아내가 반색을 하며 “내가 집땀시 제명에 못 살 것 같터서 사고를 쳤뿌렀쏘!!”~ 라고 대답하며 노심초사 하며 기다리고 있었던듯 “앉지말고 언능 가봅시다!!”~ “계약을 헸뿌렀쓴깨 인자 우리집이나 마찬가지 아니것쏘?!!”~ 라며 둘째를 들쳐업고 내 팔을 이끌며 어둠이 내리는 산동네 내리막 골목길을 휘적휘적 앞장서 걷는다. 걸리던 딸아이를 얼른 업고 아내의 옆을 바짝 따라 붙으며 궁금해서 죽겠다는 듯이 아내의 팔목을 붙들며 “차근차근 자세히 이야기를 좀 해 줘봐!!”~ 라고 다그치자 그제사 평상시의 미소 띈 표정으로 돌아오며 작심한 듯 입을 열더니 어두컴컴한 허공에다 대고 마치 하소연이라도 하려는듯 말문을 연다. 아이들 돌 반지와 돈이 될만한 금붙이를 금방에 내다팔고 꼬불치고 감춰둔 비상금을 통털은 50만원을 급전으로 만들어 계약금으로 내고 6천만원 짜리 집에다 찜을 해버렸단다. “헉!!”~ 하고 소리를 내고나서, 어둠속에 아무렇지도 않은듯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며 걷는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차~암 난 멀지도 않은 지척 한동네 에서 별스럽지 않게 평범한 당신을 만난줄로만 알고 살았는데 길게 살지도 않았으면서 당신을 감당할 수 없는만큼 통 큰 여자로 맨들아 뿌렀는갚네!!”~ “허헛~참!!”~“당신을 만난것이 복일란지 고생일란지 암상을 모르것다!!”~라고 하자 히죽히죽 웃으며 “고생이라니?” “호박을 넝쿨째 주순줄도 몰르고?!!”~ 라며 깔깔대며 웃는다. 함께 따라 웃으면서도 기대 반 근심 반으로 마음이 복잡할 쯤 혼잡한 답십리 골목시장을 건너 성당을 지나 겨우 한 사람 드나들기도 버거울 것 같은 좁은 골목길을 돌아 한 허름한 구옥 머리가 닿를듯말듯이 낮은 단독 기와지붕 처마맡에 이르러서 “서방!!”~ “각시가 찜해논 집이 시방 바로 여그 이집이요!!~” 라며 “당신이 찬찬히 함 조사를 해 보씨요~이!!~” 라며 걸음을 멈춘다. 보기에도 없어 보이고 초라해 보이기만 한 낡은 집을 가로등도 없는 어둠속에서 이리보며 돌고, 저리 재며 넘보기를 수십여분 끝에 “당신은 으떻쏘?~” “겉보긴 허름헤도 안으로 들어가먼 본채는 스라브집이라서 튼튼흡디다!!~” “모르긴 헤도 우리식구 살기는 아마 널널헐것이요!!~” 라며 내 표정을 흘깃본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곳 저곳을 샅샅이 둘러보고픈 궁금증을 간신히 누르고 “훤흘때(밝을때)다시함 와보새!!~” 라는 말을 끝으로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는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 상을 물리고 나서 우린 그날로 부터 밤이면 밤마다 집을 뜯었다 고치고 허물기로 밤을 지새며 중도금, 잔금 마련에 두달여를 고민하며 방법을 모색하고 고치고 찍어바른 끝에 드뎌 우리집에 힘겨운 입주를 완성한다. 양가의 도움과 여러 친지들의 성원에 힘입어 담보대출도 받곤 했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여 본채(스라브집)를 전세로 내 주고 나서야 겨우 입성을 할 수 있었다. 이후 근 10여년간을 빚갚고 대출금 갚느라고 어깨가 내려앉고 허리가 휘청거릴 만큼 혹독한 댓가를 치뤄냈지만 우리 부부는 그것으로 인한 불평을 단연코 한번도 입에 올려본 적이 없었다. 작고 낡은 구옥(대지 15평), 기왓장이 송송 떠서 까치집 처럼 엉성한 집에 두 세대 여덟식구가 동거를 시작했으니 세 살이 하는동안 내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뻔한 우리 귀여운 아이들이 서러운 신세를 모면했다는 현실에 신이났고 집걱정 이사걱정으로 부터 영영 해방됐다는 생각에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어렵게 잔금을 치루고 집 문서를 넘겨받은 그 순간은 이 거대한 서울도심 한켠에 내 명의로 집과 땅을 갖게됐다는 사실에 내 생애 이보다도 더 큰 기쁨과 행복이 그 어디서 또 있을라드냐 싶을만큼 고무된 생각으로 그 설렘과 흥분을 한동안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우리부부는 그날 밤 행복한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제법 오랫동안을 힘껏 껴안은채 훌쩍거렸다. 그렇게 시작한 한지붕 두가족의 동거였던지라 아무리 집 주인이라곤 하지만 안방을 내어주고 문칸방에 나 앉았으니 우리가 세들어산다는 생각으로 먼저 조심하고 배려하니 대문 밖 행길가에 문이 나있는 화장실을 쓰면서도 부딪힌 일 불편한 일 한번 없었고 나이와 터울이 같은 아이들 까지도 다투고 티격대는 일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 자연 친구,친척같은 마음이 우러나 서로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해져서 가족처럼 되어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사는동안 내내 한시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서로 잃고 살아본적이 없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은정이네”가 그렇게 2년여를 한가족 처럼 가슴 맞대고 살다 바로 앞집으로 이사를 나가고 이어 이사를 들어온 “미나네”가 또 그들 처럼 그렇게 가슴 닮은 사람들로 한 가족이 되어 갔었으니 서로에게 더없는 행운이 된 셈이리라. 그러다보니 마침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미선네”가 정을 보태 오게 되어 네 가족이 한 가족처럼 서로의 허물을 다독여 가며 필연인듯이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생활상이 서로 비슷하고 환경이나 생각이나 가족 정서가 서로 비슷해서 였던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아이들을 앞세워 공원나들이를 나서기도 하고 매해 여름이면 피서를 계획해서 네가족 모두가 계곡으로 강으로 캠핑을 다녀옴은 물론 열대야에 잠못드는 밤이면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슬라브 지붕위로 내몰려 이따금씩 삼겹살 파티를 벌려 더위를 달래며 서로의 삶을 위로하곤 했는데 그러한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허물없는 일상이 되다보니 주변 앞뒤 옆집은 물론 한집 걸른 이웃들 까지 행복 바이러스가 전파가 되었던지 이웃간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그 정겨움과 따뜻함이 담벼락을 허물고 한분 두분 서로가 이웃4촌이 되어갔다. 마침내는 슬라브지붕은 너무 좁아 엄두를 못내게 된 나머지 언제부턴가 아예 골목길 귀퉁이에 자리를 펴고 나앉기 시작했는데 시골마을 사랑방인양 길바닥에 앉아서들 서로의 삶을 드러내 놓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좁은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달라붙은 낮은 집들이었으니 바람이 통할리 만무하고 샤워 시설인들 변변했겠으며 그러는 여름밤이 온전들 했겠는가? 그 한여름이 얼마나 덥고 후덥지근 했으면 골목길로들 몰려 나오셨을까도 싶지만, 그렇게 라도 더위를 피해 골목길에 몸 기대고 서로의 삶에 부채질을 해대며 땀 밴 가슴 부비고 이웃을 가족처럼 품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사실에서, 어쩜 부자촌 동네에선 감히 생각지도 못해 봤을 거 같은 가슴 흐뭇한 이웃간 정겨움에 스스로를 위안하고 싶었고, 동병상련에 그로인한 보상심리 같은 생각들이 마음 한켠에 자리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리라. 어쩌다 마음이 통하여 삼겹살 파티라도 있는 날이라면 서로들 제각각의 손에 먹거리들을 들고 나와 굽고 지지며 이웃간 정 나눔에 밤새는줄 몰랐었으니 그렇게 한 여름은 가난한 우리 이웃들 가슴을 너그럽고 관대하게 스쳐 지나가곤했다. “답십리 490번지 이사모”(이웃을 사랑하는 모임)가 자연스럽게 생겨난지 17~8년여세월이 겹겹이 도배가 되도록 “나나네”와 “강씨아저씨”만 가까운 근처로 이사를 나가시고 대부분 이사모 회원님들은 490번지를 못 벗어나고 귀신 들린것 처럼 붙들려 산다. 그놈의 정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닮아가는 줄도 모르면서 -------------------------------------
흙벽이 떨어져서 흙벽위에 세멘을 개 덧바르고, 세멘바른 벽 또한 금이가고 갈라져서 손가락이 들락날락 겨울바람 송송, 밤이면 천정에서 서생원님 사랑싸움, 비라도 오는 날이면 여지없는 퐁당 화음에 복도엔 빗물이 넘쳐 물 바다를 이루고 대문 밖 화장실에 큰 볼일이라도 볼라치면 안으로 문고리를 붙든 채로 불안불안 쪼그려 앉아 채 몇 번 힘도 쓰기전 등굣길 오른 악동들 투정대는 발길질에 간 떨어지게 놀란가슴 겨우겨우 가라앉히고 나면 큰 볼일은 이미 까마득히 잊어 버리고 마는 화장실을 길 갓으로 간직한 집, 지붕은 들떠서 바람불면 날릴세라 금방이라도 허물어질듯 낡고 볼품없는 집임엔 틀림이 없었지만, 귀염둥이 손 움큼 처럼 아담하고 마음만은 항상 작은 새들 집 처럼 포근했던 490번지 우리들의 집, 대문 색상만큼은 연초록 풀잎처럼 항상 푸르름이 번지고 그 곳에서 함께한 애환 섞인 삶이 고운 인연이 되어 아직도 변함없이 줄 곧 이어가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추억의 집, 지금은 서로 다른 집에서 이웃을 이루고는 살아 가지만, 그래도 그때처럼 한지붕 한 집에 사는것 만큼은 못한지라 약간의 오가야 하는 수고로움은 있지만 서로의 삶에 버팀목이 된채 열심히들 그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간직하며 살아간다. 다만 얼마전 미나 모친께서 허리 수술을 받으신 관계로 3월 모임을 미루고 있는지라 서로들 애달음에 안타까움을 뒤로하며 내색은 하지않고 있지만, 하루속히 미나모친 수술 후유증에서 털고 일어나 완쾌하기를 간절히 빌며, 정답고 가슴 따뜻한 그들과 그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어 항상 내 가족이 흐뭇한 우리 이웃4촌 님들의 안녕과 평안을 진정 빌어마지 않는다. 비록 모양새는 까치집 보다도 엉성하고 손바닥 보다 더 비좁은 집이라 할지라도 그 곳에서 사랑으로 가족을 품고, 진정으로 내 가족 같이 이웃을 담을 수 있다면 그래도 우리마음이 조금은 더 사랑스럽고 더 정답고 더 여유로움으로 아주 작은 새집처럼 포근해질 수 있지 않을까?!-------------------
벌써부터 올 여름을 손 꼽아 기다리며 "노상 삼겹살 파티"를 기대해 본다. 지난 여름 이후동안 우리마을 490번지 16통 6반으로 이사 들어온 이웃들의 새로운 만남을 설레는 마음으로 환영하며------------------------
2010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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