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스러웠던 결실의 기쁨도
닳아 올랐던 오색찬란함도,
눈부셨던 초록의 기억과
화려했던 연분홍의 추억도,
어쩌면 모두가,
이 찐한 허무와 고독과
혹독한 시련의 기다림을 위한,
갈망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싸늘한 바람이 점령군처럼 다가와
황홀한 가을축제의 마지막 끝을 알리면,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껏 멋을 부린 고운 옷자락을,
훌훌 벗어 선뜻 바람에게 내어주고
앙상한 벌거숭이가 되고나서도,
추호의 흐트러짐 없는 초연함으로,
오뉴월 찜통 무더위 속에서도
끝내 벗기를 거부했던,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악착같이 추스렸던 옷자락을,
아무런 저항도 주저함도 없이
스스로 한 올 한 올 허물을 벗고,
틀어쥐었던 작은 주먹손마저
손가락까지 곧게 펴 내 보이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빈손임을,
스스로를 시련키 위한 완전한 맨몸임을,
길고길 냉혹한 기다림 앞에
혹독하고 뼈저리게 맞을
처절한 준비를 마쳤다는 듯,
우주의 법칙에 순응함을 일깨우려함인지?
대자연의 겸허함에
겸손을 실천하려는 것인지?
완전한 비움의 끝에서만이,
처절한 기다림의 끝에서만이,
혹독한 시련을 넘은 저 언덕 끝에서만이,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 싹튼다는 사실을
엄중히 실현해 보이려함인지?
저 초연함 속의 침묵은 무엇인가?
저 의연함 속 작은 흔들림은 무엇인가?
내 어깨에 멘 빈 배낭 속엔 고작
손바닥만 한 물 한 병이 전부건만,
무엇이 이토록 무겁고 버거운가?
웬 것이 이토록 힘겹고 숨 가쁜가?
무엇을 더 버리라?
무엇을 더 비우라?
무엇을 더 놓으라?
2014년 1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