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간벽촌 시골마을에 기계문명이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음마를 내딛기 시작하던 아득한 옛날, 이 골목 저 어귀마다 곧고 길다란 콘크리트 전봇대를 하늘을 치받칠 듯 세워 박고, 팽팽히 전깃줄을 잡아당겨 옴짝달싹을 못하게 서로 묶어 곧추 세워, 거미줄 치듯이 가가호호에 전깃줄을 느려가 집 안팎 요소요소마다 신기하리 만큼 예쁘고 투명한 전구다마를 천정에 매달고 나자 이내 그 것으로 인한 새 세상이 열리고 초저녁 밤을 위태로이 껌벅이며 불 밝히던 석유 호롱불이, 그 시대를 마감하고 물러나 앉으며 그것으로 인한 문명은 비로소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내 아버지께선 뭐가 그리도 바쁘셨던지 서둘러 일찍이 황천길을 홀연히 가시고, 어려워진 형편 탓에 전기시설 부담금을 내고 전기 수용신청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무리였던지라 어머니의 고민은 날로 깊어만 가시는데, 이를 알아챈 누나와 형이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집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호롱불 신세를 면키 어려울 것이라는 다급함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어머님을 설득하고 매달려 애원하고, 울며 앙탈을 부려보기도 하면서 까지, 얼마나 신경전이 치열하였던지 그 기억이 지금도 서글픈 추억이 되곤 한다. 결국엔 오랜 속앓이 끝에 어머니께서 항복하시듯 승낙을 하신 후 그렇게 우리 집에도 간신히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20촉짜리 백열전구에 불이 켜지던 역사적인 날 우리 어머니께서도
『심봉사가 눈을 떴을 때가 요만큼이나 훤허고 좋았었을랑가 모르것다!!~』
라시며 기쁨을 감추시지 못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서, 아지랑이 아른거리고 노란나비 흰나비 춤추며 봄나들이 떠나고, 살구꽃 복사꽃 화사하여 막 농사철이 시작 되려는 봄 농 짙은 어느 날이지 싶다.
방송국에서 왔다 시며 각 마을 집집마다 스피커를 달아 드리고, 설치비용 금으로 200원(?)을 받아 갈 요량으로 신청을 받고 있는 중 이라며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에, 내 어머님은 더 들으실 필요 없다는 듯이 일언지하에 손사래부터 치시며 그들을 돌려 세우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사시간 누나가 어머님 눈치를 살피며,
『어머이~ 오늘 방송국에서 쓰피카 달사람 조사 나왔다고 허든디?~』
『이~ 울집도 왔드라~』
『내가 말도 못 꺼내게 헤서 보내부럿다!!~』
『너 또 행이나 그거 달자고 고집부릴라고 묻냐?』
라시며 눈을 흘기시자 누나 눈에 눈물이 금방 그렁그렁 맺히며,
『어머이는 맨나 그레!!~』
『선애랑 명옥이랑 경순이랑 다른 집들은 전부 다 신청을 했단디~』
『또 우리만 그렇게 쏘옥 빠져뿔먼 어쩐대?』
라고 응수하며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아니다. 전기 문제로는 누나와 단번에 한편이 되었던 형은 상상외로 침묵하며 눈치만 살피고 있었으니 이미 판가름 난 듯 했었지만, 어머니와 누나 사이의 날카로운 신경전은 그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 되었다. 가끔은
『어머이!!~』
『어머이 말 더 잘 듣고, 어머이가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허께!!~』
『우리도 스피카 좀 달자!!~』
라며 어머님 마음을 달래보기도 하고, 때론 눈물을 짜내며 하소연도 하다 이따금씩 어머님의 속을 들쑤셔 불을 질러 혼쭐이 나면서 까지도, 밥상머리에 앉을 때면 늘 그렇게 날선 긴장감은 반복이 되곤 했었다. 허나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다 하던가?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홀어미 당신 슬하에 중학교 진학이란 엄두도 못내 볼 일이었던지라 그 어린 것을 옆에 끼고 잔일 궂은일 가릴 틈 없이 막 부리시다 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때론 가엾고 애처롭기도 하셨으리라. 내내 그런 상황이 줄곧 되던 어느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포기하시듯 네 맘대로 하라시며 승낙을 하고 마시는 어머님께 “고맙다” “인자부터 어머이 말 더 잘 듣고 일도 열심히 하겠다”를 연발하며 환한 얼굴로 눈가에 눈물을 닦아내던 내 누나의 모습이 45년여의 세월을 털어내며 당시 열다섯 열여섯 이셨을 그때가 생생히 기억에 되살아난다.
그렇게 시작된 라디오(스피커)시대!!~
유선(피피선)을 꼬리처럼 이어달고 집집마다 마루 천정이나 집 기둥 벽 한켠에 자리를 차지하고 내걸린 스피커는, 그 시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첫 수단의 통로를 확보해 가며, 대중문화에 낯 설은 농촌 생활에 활력과 즐거움을 제공하는 제일의 매체로 급속히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조그맣고 허름한 통에 불과한 것이, 때맞춰 온갖 다양한 세상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하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비롯하여 번뜩이는 새로운 정보는 물론, 노래면 노래 창이면 창 못하는 게 하나 없고, 사람을 울렸다 웃기고 웃기다 울리는 요술 상자 같은 것이었으니 얼마나 신기하고 기가 막힐 물건이었겠는가? 그 궁금하고 신기함을 감당해내지 못하셨던 당시 나이 드신 일부 어르신들께서, 도저히 이해 못할 그 신비한 놈을 급기야 끄집어내려 통 안을 홀랑 까고 뒤집어 확인해 보고나신 후에야, 허탈을 금치 못하셨다는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들렸었으니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 아닌가!?
비록 선택할 채널도 없고 음을 조정할 아무런 장치도 없었던 그저 얇은 베니합판을 붙여 만든 볼품없는 막통 스피커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 희한한 물건을 요즘 폼 나고 세련된 고급 디지털 LED 평면TV같은 고급 가전제품들과 함께 비교를 한다고 한들 어찌 감히 그때 그 물건과 이것들을 맞견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적어도 내 누님한테는 그 이상 훨씬 더 소중하고 귀한 애장품이 아니었을까 감히 단언해본다. 당시 우리 마을 누나의 친구들은 7~8명이 한 물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중에 한 둘 누나만 진학하여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세 네 누나들은 서울 부산 등 객지를 향해 돈벌이들을 나갔었으며, 내 누님을 포함한 남은 세 넷 누나들은 부모님 슬하에 고삐를 틀어 잡힌 채 운명처럼 그렇게 붙들려 살았었다. 논밭에서 사시듯 하셨던 부모님들의 고단한 시골 농촌 생활에 일조하며, 가사를 돌보고 동생들 챙기며 밥 짓고 빨래하는 것은 기본, 진일 궂은일에 손 마를 날 없어 그 긴긴 하루해는 무던히 분주하고 짧기만 하였으리라. 꿈 많고 사랑 많은 소녀시절 그 변변찮은 시절에 무슨 즐길 꺼린 들 온전한 게 있었겠으며, 그 투명한 시골마을 아낙네들의 불쏘시개 같은 입소문으로 부터 자유스러울만한 게 뭐 있었겠는가? 그저 틈틈이 짬짬이 우르르 이집 저집 몰려다니며 사소한 이야기 꺼리에 서로들 깔깔대고 웃고 떠들어대는 게 하루하루의 낙이었다면 낙이었었을까!? 때 되면 부모님 서슬에 지레 겁먹고 쪼르르 집 찾아 가기들 바빴을 것을, 그러했던 그 시절 그렇게 그들의 귀와 마음과 생각이 기둥 높은 곳에 매달린 스피커 속으로 홀린 듯 빨려 들어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 아니었던가 싶다. 라디오 방송이 시작 되는 그 시간부터 온통 내 누나의 일상은 그 스피커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밥솥에 불 지피고 밥을 하다가도 어쩌다 운 좋게 잘 아는 유행가라도 한 곡 흘러나올 때면, 부지깽이로 밥솥과 부뚜막을 드럼 치듯 번갈아 두들기며 박자를 맞추고 음을 타가며 흥을 주체치 못 하다가, 어머니께 머리통을 얻어맞는 일이 다반사였고, 연속극 여명의 눈동자(?)였던가 뭔가가 시작할 시간이 다가오면 하던 일을 다 멈추고 라디오 밑에 아예 자리를 틀어잡고 앉아, 주인공이라도 된 양 함께 쫓고 쫓기며 울고 웃고 애달아하는 사이, 빨래는 타서 연기가 풀풀 하고, 새참으로 내어갈 고구마는 숯검댕이가 되기 일쑤였으니, 라디오 설치를 승낙하셨던 우리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우셨을지 가히 짐작이 되지 않으신지?! 그러나 그러시던 우리 어머니께서도 저녁식사를 마치시고 연속극 할 시간이 다가오면, 당신이 먼저 우리 모두를 입막음 하시며 쉬쉬 조용하라 당부 하시고는, 라디오 속으로 파고 들어갈듯 하셨으니 내 누님한테는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이고, 우리 형제한테는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었겠는가?!~ 언젠가 한때는“옥단춘”이라는 고전극이 연속극으로 엮어져 방송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야말로 그 스피커의 인기는 요즘의 TV 인기 드라마를 훨씬 능가하고 족히 남을 만큼 굉장한 인기를 누렸었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밤이면 밤마다 이웃 어머니들께서 아버지가 없으신 우리 집으로 들 겸사겸사 밤나들이를 오셔서 고단한 몸 겨우겨우 달래시며 잠을 쫓고 계시다, 마침내 그 옥단춘 주제곡이 시작될 때면 금방 알아채시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 숨죽여 귀 쫑긋 세우시고는 라디오 밑으로 몰려드셨다. 극중 상황 변화에 따라 함께 박수를 치기도 때론 탄식을 하기도 하시며 내내 조마조마해 하시다 아슬아슬한 순간 잔뜩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끝을 예고할 때면 그렇게들 아쉬워하시며 후일담 이야기로 꽃을 피우시다, 이내 쫓기듯 서둘러 자릴 털고 일어들 나셔서 내일을 약속하시고 휘적휘적 밤길을 재촉해 가시곤 하셨던 우리 어머니들의 그때 그 모습 생각에 나도 몰래 배시시 절로 웃음이 번진다. 어디 그 뿐인가? 정오쯤이면 “김삿갓 북한 방랑기(?)”가 끝나고 곧바로 이어지는 “한낮의 노래 선물(?)”이었던지 “행복 실은 희망가요(?)”였는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구례 중계 방송국”에서 뉴스와 함께 정규 방송이 끝난 후 지역 프로그램 시간에 애청자들의 신청곡을 엽서로 받아 신청사연과 함께 그 내용을 소개해 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때마침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를 기다렸다가 라디오 밑에 붙잡아 앉혀두고는 맘에 드는 노래가 흘러나오기라도 할 때면 누나는 급하게 달력 뒷면을 마루에 펴 놓고 열심히 한 소절 한 소절 가사를 받아 적다가 미처 필기력이 노래 가사를 따라잡지 못하게 될 때면 “니가외워” 라고 소리를 친다. 그때부터 몇 소절을 내가 암기를 해야만 했었는데 초등학교 2~3학년 이였던 내가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었겠는가? 매번 꿀밤세례를 받기가 일쑤였지만 그 일이 내겐 그래도 그리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내 누나는 라디오를 통하여 세상과 소통하고 라디오와 함께 소녀시절의 꿈을 키웠던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기억이 새롭다. 어느 날은 또 그렇게 누나한테 붙들려 라디오 밑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청력을 집중하고 있는데 “구례군 용방면 신지리”에서 익명의 모모 아가씨로 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듣고 싶다는 사연이 거짓말처럼 순식간 귓전을 울리며 신청곡이 이어진다. 순간 누나와 난 동시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놀라서 서로를 질겁하고 바라보며,
『뭐시라고 그러냐? 시방?』
『아니!?~이거이 참말이여?~』
『시방 분명히 우리 동네를 말흔거 맞제?』
『아니 그먼 누가 그레딴 말이여~ 시방?』
거짓말처럼 일순간에 우리 마을 명이 아나운서 음성을 통해서 전역에 방송되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더군다나 방송을 통해서 대놓고 사랑을 운운 했다는 사실은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서는 엄청난 파장이 몰아칠게 불 보듯 뻔했었기에 그 놀라움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공공연히 공공장소에서 까지 버젓이 애정행각을 주저치 못한 젊은이들이야 이해하기 힘들 일일 테지만, 그 시대 그 당시 내 누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도대체 요 간뎅이 큰 가시나가 누구다냐?』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가며
『명옥이? 선애?』
『아니』
『경순이? 말남이?』등
한 누나 한 누나의 이름을 쭉 되뇌며 한참을 머리를 굴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잽싸게 밖으로 달려 나간다. 이따금씩 숨어숨어 엽서를 눌러 적던 누나의 모습을 보아 왔던지라 난 혹시 내 누나가? 하고 의심을 품어보기도 했었지만, 그것으로 인한 소문은 급속도로 온 동네로 번져나가며 무성한 입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갔다. 족히 예상했던 것처럼 동네 구석구석을 들쑤셔 발칵 뒤집어놓고 나서도 한참을 요동치며 꽤 오랜 시간동안을 사그라질 줄 몰랐었다. 그렇게 온 동네가 떠들썩한 가운데, 자칫 잘못하면 자기한테로 소문이 튈 줄 모른다는 불안감에 누나들 서로간 거리를 두고 눈치를 살펴가며 경계하고 몸을 사리는 모습들이 역역했었으며, 그 모습들이 마침내는 애처롭기 까지 했었으니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우습고 신선한 뉴스꺼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그렇게 우리 생활에 가깝고도 깊숙이 파고들었던 라디오는 내 누님 세대의 삶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함과 함께, 커다란 전환점이 되기도 했었던 것 같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내 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담봇짐을 쌌다네”~ 처럼 “앵두나무 처녀”가 유행할 때면 시골 마을에도 여지없이 객지바람이 몰아치며 온 동네가 들썩거렸고, 그럴 때면 내 누나도 예외는 아니었던지 급기야는 그 여린 가슴에도 거센 불이 옮겨 붙었었다. 서울 가서 돈 벌어 오겠다며 내 어머니 속을 몇 날 며칠을 긁어대다, 기어코 어느 날 맘 잘 맞고 서로 눈치 잘 통하는 누나 친구들 몇몇끼리 은밀히 모여 앉아 귓속말을 속삭이곤 하던 끝에, “시골 촌구석을 뜨자”는 비밀 약속을 한 후 만반의 준비를 거듭하고 나서, 모일 모시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기로 입이 모아져 있었다가, 마침내 결행 당일 어느 누나의 보따리를 안고 급히 나가는 수상한 행동이 그 누나의 아버지께 꼬리가 잡혀 들통이 나버린 바람에 내 누나를 포함한 누나들 모두가 덜미를 잡힌 채 적잖은 댓가를 호되게 치르고 나서야, 또다시 귀신에 붙들린 것처럼 그렇게 시골에 눌러 잡혀 앉게 되었던 서글픈 사연을 남기기도 했다. “시골 농촌을 벗어나 돈 많고 사람 많은 서울로 가서, 보란 듯이 나도 출세해서 돌아 오련다”라는 야심찬 누나들의 탈출 계획이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며, 비로소 내 어머니께서도 놀라 새까맣게 타서 구멍이 송송하시던 가슴을 쓸어내리시며 눈물을 짓던 모습을 가까이서 보며, 내 작은 가슴에 설움이 복받쳐 훌쩍거렸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환하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네~” 라는 노래가 유행 할 때면 어머니 따라서 논밭으로 일 나다니던 내 누나의 발걸음은 한결 가볍고 경쾌했었던 것 같은 기억이 꿈속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열악한 농촌 주변 환경과 가난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 보고자 했던 열대여섯 청순소녀, 라디오가 전해 주는 바깥 세상에 눈을 떠가며 더 넓은 세상 더 커다란 세계를 동경하며 꿈을 품던 누나였을 테지만, 어린 네 남매를 간신히 끌어안고 홀몸으로 이 세상을 숙명처럼 버텨내셔야 하셨을 절박하고 아슬아슬한 내 어머니의 소박하신 삶 앞에, 그저 맥없이 붙들려 주저앉고 포기해야만 했던 내 누님의 삶은 그 후에도 내내 핑크빛과는 다소 좀 거리가 있었던것 같다. 맘은 크고 넓어 다정함과는 달리 아직도 무엇에 붙들린 것처럼 어머님 주변에서 저 멀리 훌훌 벗어나질 못하고, 눈에 뵐 듯 가까운 주변에서 맘껏 행복껏 살아주지 못하는 누님 이야기를 하실 때면 고단한 삶 애써 살아내신 내 어머니께서 가끔씩
『내가 그때 니 누야를 기냥 가게 놔둬부럿써야 헸는디~』
『그렇게 훌훌 지 맘때로 넓은 세상으로 도망쳐가게 내부럿써야 헸는디~』
『나 살자고 그것을 내가 잡아 앉쳤어!!~』
『그거시 내가 시방까지 죄가 되뿐거이여~』
라시는 자조 섞이신 어머님의 회한을 들을 때면 나도 몰래 금방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다소 건강이 염려스럽긴 하지만 지금은 애써 평안과 행복을 찾으신 내 누님!!~ 행여 혹시 예전 그때 그 소녀쩍 처럼 라디오 앞에서 이 방송을 들으신다면, 비록 마음으로나마 그 오랜 동안 누님의 수고스런 삶에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니 부디 평안과 행복으로 충만한 시간이 되시기를!!~그리고 여든여섯 연세에도 비교적 건강히 정정한 품위를 유지하고 계시는 내 위대하신 어머님께서도, 아직까지 털어내지 못하시는 누님께 갖고 계시는 그 미안하고 죄스러운 생각으로 부터 이젠 편안히 벗어나시는 작은 위안 내지는 치유의 기회와 시간이 되실 수 있으시길 간절히 희망해봅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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