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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특별한 일상

어머니(이 독한 놈! 이 나쁜 놈!! 네가 그러다 참말로 죽겠구나!!~)

"뚜르~욱!! 뚜르~루욱!!"하고 전화 송신음이 두번이 울리고 세번이 울리려는 찰나 쯤 "또륵"하고 연결음이 들리며 기다리고 계셨다는 듯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시는 정겹고 사랑스런 음성이 곧이어 "멩하냐?" 라시며 반가히 되 물으신다. 예~에!! 저예요!! 하자 "인자 들어왔냐?" 물으시곤 내 답을 기다리신다. "예!!~" "저녁 진진 드셨어요?" 라고 여쭈자 "이~ 인자묵고 테레비 본다"  "식구들은 다 들어 오고요?"라고 여쭈니 "네 성은 들어와 씻고, 성수는 설겆이 한다" 조카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현주는 들어와서 컴퓨터 하고 선영인 알바트(아르바이트)한다고 늦는단다"라신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지요?" "이~ 춥드라!!"하셔서 "추울땐 웃 집에도 좀 덜 다니세요!"라자 "그렇게 자주 댕기가니?" "요새는 일좀 하냐?"라고 물으신다. "예~에!! 쪼끔씩 해요"라고 말씀드리자 이젠됐다 라시는듯 "배고프것다 언능 끊고 밥묵어라" 라고 하시며 수화기를 내려 놓으실 채비를 하시자 급하게 끼어들 듯 "그래요!! 그럼 편히쉬세요!!"라는 말씀을 끝으로 수화기를 놓고나서 그때서야 옷을 바꿔입고 손을 씻고나서 허겁지겁 저녁식사를 시작한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고 나면 옷을 갈아입기전 습관적으로 행하게되는 나의 일상의 마지막 행사이기도 하다. 가끔은 "저녘 반찬을 묻기도 하고 오늘은 뭐하셨느냐고 여쭈시자면 반찬을 일일이 기억하시며 말씀해 주시기도 하고 "오늘은 네 처갓집에가서 놀다가 맛난것도 묵고 밥줘서 밥도 묵고 여러 할마이 들이랑 잼있게 있다 인자왔다" 라시며 흐뭇해 하시는 어머님의 음성에서 건재를 나름 진단,확인하고 팔순하고도 세해를 더 보태시면서도 정정하신 어머니와, 어머님을 모시고 큰 불평없이 시골 생활에 열중하시는 형님과 형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접는다.

 

    
내 나이 여섯! 내 기억에선 이미 지워져 버리고 없는 일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45년전 1963년도 가을 초입 추석을 넘긴지 몇 일 후쯤의 일 이리라. 해를 거듭한 병상끝에 네살,여섯살,아홉살,열두살 짜리 4남매를 세상에 고스란히 남겨두신 채 애석하게도 세상을 앞서가야 하셨던 아니 앞서 떠나보내야 하셨던 서른여덟 청상의 일생을 어찌 이 지면에 다 담아낼 수 있으랴!? 통한의 슬픔에 겨워 한가히 눈물 찍어낼 틈인들 있으셨을까? 무엇이 그리도 급하셨던지 내 아버지는 오랜 병고 끝에 그 시대 두번의 대 수술을 시도하시면서 까지 삶에대한 애착을 연명하시다 마흔여덟 청춘에 마지막 가시는 인생길을 그렇게 허망하고 그토록 무정하게 돌아가셨다 하니 얼마나 원통하시고 애통하셨을지 지금에 이르러 그 심정을 어찌 다 헤아려 형용할 수 있으리. 물론 어느 누구인들 그 연세에 여한과 미련인들 없으셨을까만 변변찮은 시골 생활에 긴긴 병고끝의 그 살림살인들 온전 했었겠으며 그로인한 허탈과 상실감에 따른 상처가 어디 하루이틀 앓다말고 잊을만한 일이었겠는가? 그 당시엔 당장 초상치룰 일 마저 막막했었다 하니 살아남은 사람들의 그 시절 그 상황은 오죽했었으랴? 여러 이웃들과 친 인척들의 도움에 십시일반으로 겨우 아버님 상을 치루고 참담한 현실 앞에 어린 네 자매를 끌어안고 길바닥에 나 앉은듯한 청상의 심정은 어떤것이었을까!? 과부? 한 여자? 한 여인이기를 거부한 오직 네 어린 아이들을 가슴에 혹처럼 매단 한 어머니 였어야만 하셨을! 그렇다고 어린것들 앞세우고 손 놓고 앉아 죽어갈수 만은 없었던 탓으로 대여섯 마지기 되는 농사일에 미치신듯 몸을 부리시며 소리없는 한탄과 긴나긴 한숨속에 세월을 줄타기 하시듯 아슬아슬 겨우겨우 힘든 삶을 밀어내시며 한 많은 삶을 견뎌내셨으리라. 힘든 보릿고개를 넘으시며 어린 저것들이 하나만 됐었어도 좀은 나을까 싶기도 하셨을 테고, 부서져라 일년농사를 짓고나면 빚 갚기도 모자라 또 다시 빚을 얻는 형편이 해를 거듭하자니 자식새끼 다 버리고 팔자라도 고쳐볼 생각인들 왜 않해보셨겠는가? 그시절만 해도 우리 가까운 주변에 어려운 현실에 떠 밀려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절간으로 가기도 하고 듣도 보도 못한 곳곳으로 양자나 머슴으로 떠나 가고들 하며 한 가정이 해체 돼 가는 불행사가 다반사였었으니ㅡ, 요즘 TV 프로에 그들이 서로를 다시찾고 다시 만나며 시청자들을 눈물 짓게하는 사연들이 바로 그 가난하고 험난했던 시절 그 시대의 실질적인 피해자들이 아니겠는가? 가끔 그 TV방송 프로를 보게되는 때면 아내나 아이들 모르게 눈물 훔치며 긴 한숨으로 우리도 하마트면 하는 아찔함을 느끼며 내 어머니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삼 고마움을 되새기곤 한다. 그 어린시절 언젠가 내 밑에 여동생이 추수를 하고 쌀방아를 찧어서 집에는 싣고 들어와 볼 여유조차도 없이 방아실(정미소)에서 곧장 빚 갚는 일을 내내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끝에 "어머이!~ 우린 언제쯤 쌀방아 찧어서 우리 두지(뒤주)에 넣어두고 우리쌀밥 한번 묵어보까?" 하더란다. 어린 동생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으면 그런 말을 했었을까 싶고 어린 입에서 그런말을 듣고난 어미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시리다. 체격이 워낙 작으셔서 한 동안 우리마을 3대 째깐할매(?)중 한분으로 통하셨던 아주작고 가냘팠던 그 여인, 이제와 생각하니 그 분은 어느 어머니 못지 않으시게 강하시고 넓고 크셨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납작골 꼴짝에서 긁어오신 찰가리 나뭇동이 그러셨고, 그 힘들고 모진 세월을 헤쳐 살아 나오시면서 한번도 앓아 누워 보신것을 본적이 없으신 그 강인함이 그러셨다. 남들 앞에 나서시는 일 한번 없으셨고, 그렇다고 등 뒤에서 남 험담하셨던 적도 없으셨던, 혼자라는 핑계로 이웃에 동정을 바라셨던 적이나 가까운 일가나 친척들께 손을 내밀어보신적 또한 없으신, 당신의 가련한 신세를 원망하시거나 억울해하셨던 적은 더더욱 없으셨던, 우릴 대놓고 혼내시는 일은 물론 쉬이 칭찬하는 일도 결코 없으시던 내 어머님이 그러셨다. 소리내서 우시는 모습 한번 본적이 없고 그렇다고 소리내어 활짝 웃으시는 모습 또한 본적이 없는 내 어머니, 홀몸으로 어린 4남매를 키우시며 그런 평범한 일상 마저도 어쩌면 내 어머니껜 사치고 호사였을줄도 모른다. 그저 청상의 몸으로 살아남기에 안간힘을 쓰시고 구멍이 송송 뚫린 자신의 울타리를 매만지시며 더디가는 세월 속에 두 어린것은 가슴에 품으시고 세살 터울진 두남매의 어른스러움을 의지삼으시며 조마조마한 순간순간을 겨우겨우 견뎌 내셨으리라. 밤이면 그 어린 두 남매의 친구들을 불러다 작은방에다 함께 재우시고 허깨비 같은 그것들을 기대시며 길고 긴 밤을 새우시고 그 숱한 시간들을 숨죽여 헤아리시며 힘들고 고단한 세월들을 버텨 내셨으리라. 우리집엔 밤낮을 항상 누야(누나)의 친구들과 성(형)의 친구들로 들끓었다. 누나와 형의 인기도 한 몫을 했을 테지만 우리 어머니의 의도적인 바람도 있었으리라. 밤이면 부엌을 가운대 둔 끝방(작은방)에서 어찌나 쿵쿵대며 떠들고 장난질이 심했던지 구들장이 내려앉고 벽이 물러날까봐 어머니의 걱정이 항상 크셨다. 그러시는 걱정의 뒤켠으로 세월이 내려 앉고 해를거듭한 세월은 무심하지 만은 않았던지 다행스럽게도 시간은 우릴 그 시절 그 어린 코흘리개 들로만 붙잡아 둘 수는 없었으리라. 누나가 차츰 부엌일을 거둘게 되고 형은 자기보다 더 키가 큰 지게에 볏단을 짊어지고서도 어머님을 따라 곧잘 농사일을

 

 

거둘며, 네살박이 어린 동생도 언니 오빠들을 따르며 어머니 손길을 조금씩 줄여 드리니, 이따금씩 허약한 내가 자주 병치레를 하느것 빼고는 이제 어머니의 가슴에서 긴 한숨소리는 점차 그 횟수와 시간이 줄어든가 싶었다. 겨우겨우 누나가 국민학교를 졸업하

 

 

며 곧장 가사를 돕게되고, 두 형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며 대견한 일을 했을때나 네 남매의 성장이 세월을 앞질러가듯 새 같은 가슴에 근육이 생겨나고 제법 어른스런 말과 행동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 싶으실 때면 그때 그 심정이 어떠셨으리라는 것을 내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따름이다. 세월이 거듭 될수록 조금씩 성장해가는 우리를 보시며 대놓고 자랑삼아 입에 올리시진 못하셨겠지만 대견스

 

 

럽고 든든함을 당신 혼자서 벅찬가슴 숨겨가시며 섪도록 느끼셨으리라. 아버지를 많이 닮아간다는 형 모습을 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삶에 남다른 보람과 위안을 얻으시고 삶의 이유와 자긍심을 찾아가시며 거칠고 외로운 삶에 다소나마 애착을 가지셨을 내 어머니!! 그도 잠시, 누님에 이어 형까지 중학진학은 꿈에도 못 꾸실 형편이었던지라 진학은 커녕 당신 옆에 끼시고서 힘든일 험한일에 내몰아야 하셨던 어머니의 심정은 또 어떤것이셨을까? 공부를 곧잘하며 미술에 남다른 재주를 보이기도 했던 형이 국민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학교정문 벅수를 부등켜 안고 그렇게 서럽게 울더라는 내 형님을 이야기 하시며 이따금씩 눈가에 촉촉한 회한의 눈물이 고이시곤 하셨던 내 어머니!! 시대가 시대 였던지라 그 시대 땐 누구나에게 사람은 나서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서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는 속설이 삶의 정설처럼 여기며 살았으니 내 누님인들 그 객지 바람에 무관심할 리가 있었겠는가? 서울로 돈벌이 가겠다는 누님을 죽기살기로 잡아 앉히셨던 내 어머니, 누님을 출가 시키시고 몇 수년이 흐른 뒤 여동생을 부산 어딘가 빵 공장에 내 보내시고 밤마다 눈물 훔치시며 노심초사 하시던 어머니를 보면서 누님께 그러셨던 그 이유를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춘기와 청년기를 호되게 치루시던 형의 뒷감당에 전전긍긍 하시며 말씀깨나 하시던 동네 아재들를 찾아 다니시며 읍소하시고 지서에 선처해 줄 것을 사정하며 다니시면서도 못 가르치고 뒷바리지 못하신 당신 탓이라 죄스러워 하시던 그 심정을 내 어떻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으리! 꽃 같은 열아홉 딸을 끌어다 한동네 재취 자리에 시집 보내시고 아둥바둥 힘겹게 살아가는 딸의 모습을 그저 먼발치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셨을 딱한 어미의 심정은 어떤것이었으며 형이 장성해서 아버지의 역활을 톡톡히 대신하다 훌쩍 군대를 가게됐을 때의 아린심정! 그 장남의 기구한 혼인사(婚姻事)며, 사는게 누구나 다 그러했을 테지만 형님과 형수님의 순탄치 못한 삶을 줄곧 곁에서 지켜보셔야만 했을 당신의 심정은 얼마나 애가 타시고 조마조마 하셨을까?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그래도 내심 믿으시고 당시는 중학교 진학일랑은 엄두를 못낼 형편이었던지라 누나나 형, 동생 한테는 생각도 못해 보셨을 상급학교를 그래도 한 놈은 머릿속에 먹물칠을 해둬야 옳지 싶으셨던 절실함으로 어렵사리 고등학교 까지를 졸업시켜 놨던 둘째 놈 마저 머리 커지고 나더니 제 친구 놈의 위급함 앞에서는 정작 어미를 배신하고 친구를 두둔하며 곡기를 끊고 억장을 질러댈 때는 "이 독한놈! "이 나쁜놈!!" "네가 그러다 참말로 죽겠구나!!"라시며 절규하고 절망하시던 그 모습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죄스럽고 후회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 어려웠던 시절을 홀몸으로 지탱하시고 힘들게 이끌고 오신 내 어머니의 외롭고 고단하셨던 청상의 삶이 우리에겐 더없이 고귀하고 위대하신 삶이셨다는걸 내 아이들을 기르며, 밤새 딸애를 기다리고 내 아이를 군대 보내며 그때 그 기억들을 떠 올리고 내나이 쉰을 지나서야 겨우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우리 4남매의 가족 울타리를 흠집하나 없도록 지켜 주시고, 가난과 부족함 속에서도 굶주림을 몰랐었고 그렇다고 부끄럽지도 또한 비천하지도 않았던 우리 남매들의 지난 삶, 비록  홀몸이셨지만 아버지의 빈자리를 허용치 않으셨고 정직과 성실 근면과 검소를 타일러 주시지 않으셨어도 어머니의 삶속에서 스스로들 깨우치게 해 주셨던 어머니, 체격은 작으시나 넓고 크고 깊은 가슴과 강직함을 지니셨던 내 어머니! "부모 복을 못 타고나서 너희들이 고생한다"시며 미안해 하셨던 우리 어머니! 그것이 어찌 어머니의 탓이겠는지요? 크게 성공해서 어머님을 훌륭하게 못 해드린 저희들의 부끄러움이 더 큰 탓이고 곧 불효가 아니겠는지요!?. 비록 온 하루를 공치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지만 아들 일 많아지기를 성주님과 조상님께 빌고 계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이 불효자는 더없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자주 못 뵈드림이 죄송스럽고, 후하게 용돈한번 못 쏴 드림이 또한 죄스러울 뿐이지만 언제든 전화드리면 어머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에 또 있으며 이 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엔들 또 있으리까? 어머님 돌아가신 후 울고불며 후회치 않으리라고, 어머님 세상 떠나신 후 이고지고 다니며 제삿상 후하게 차린들 뭐 하겠느냐고!? 살아 생전에 힘껏 편히 잘 해드려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 하건만 아직도 쉽지 않음은 쉰을 다 살고도 여직 철이 덜 든 탓인가 봅니다. 이젠 누님도 나름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시며 그 삶을 사랑하시고, 형님과 형수님의 관계가 이해와 사랑으로 복원되어 조카들 마저 건강히 잘 자라 남 부럽지 않을 만큼 학교 공부 열심하니 그 곳 아랫목의 어머님 자리도 또한 편안하시고 온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머이~ 어머이!~ 우리어머~이!!~ 부디부디 가시는 그날까지 더도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옥체 보존하시어 당신의 바람처럼 추하신 모습 남김없이 돌아가시는 그 길이 여한없고 미련 또한 없으셔서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행여 어쩌시다 정신을 놓으시고 방황하시는 일 있으시더라도 이 아들이 당신과 눈을 마추며 "어머이~"하고 부르거들랑 가끔은 한 두번 씩 이 아들을 기억해 주시고 흐뭇한 미소로 절 알아 봐 주신다면 더없이 감사하고 고맙겠습니다. 혹시라도 어쩌시다 어머니께서 염려하시는 추한 모습 추한 시간이 이어진다 하시더라도 당신께서 우리 4남매를 이렇게 곧고 건전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조금도 부족함 없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귀히 길러주신데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보은하는 마음으로, 가끔은 어머님을 힘드시게, 이따금씩 어머님을 가슴아프시게 해드렸던데 대한 반성과 속죄하는 마음으로 어머니께 진 빚을 갚는 기회의 시간이라 여겨주시면 아니되겠는지요? 어머니의 염려스러움이 어쩌다 현실이 되어 다소 보기 불편하고 힘든 모습이라 할지라도 결코 우리 어머니의 본의가 아니시라는 것을 익히 아는바, 어머님의 살아생전 못 다해보신 애교섞인 투정이라 여기고 그러시는 어머님께서 살아계심 하나만으로 감사하며, 어머니께서 우리 4남매의 기저귀를 한결같으신 웃음으로 갈아 주셨던것 처럼 기꺼운 웃음으로 어머니의 그 수고를 흉내 내 보려하는 저희들을 그래도 불편하다 하시겠는지요!? 당신의 마지막 모습이 행여 그러실까봐 노심초사하시는 내 어머니, 오늘도 어제처럼 해가 기울고 사방이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니 전화기 손 닿을 근처에 서성이시며 벽시계 올려다 보시고 날 기다리고 계실 우리 어머니!! 어머니 기다리심에 조바심 생기실까봐 바쁜걸음 재촉하며 집으로 향합니다. 사모하는 내 어머니!! 은혜하는 우리 어머니!!
     
2008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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