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생일을 겸한
휘녀석의 나들잇길
"소풍"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와,
주일 산벗산행 약속을
놓친 아쉬움을 접고
차라리 잘 되었다
맘 편히 여백의 시간을
누림 해보리라
일탈을 시도하려는 찰나,
개구리들의
요란한 함성
휴대폰 소리가
일탈의 꿈에 초를치며
순식간에 일상 모드로
자동 재 돌입 한다.
몇 마디를 나누고
15분 후 도킹을
약속한 후
서둘러 배낭을 챙겨
휙 어깨에 들쳐메고,
지하철역 계단을
훌쩍훌쩍 내리뛰어
폐문 직전 간발의 차로
지하철 열차에 진입
한 정거장을 이동 후,
곧 7호선으로 환승
용마산 역에서 하차
급히 지상으로
솟구쳐 튀어올라,
물 한 병과
진태고량주 한 병을
뽑아 계산을 마치고
배낭 양 옆 주머니에
급히 꽂아 넣음과 동시
용마산 능선을
바람처럼 올라챈다.
거친 숨소리에
진초록 갈참나뭇잎이
헐떡거리며
부채질을 해대고,
용마폭포 절벽 난간
안전철조망 안 아슬아슬
홀로 핀 나리꽃도
그러잖아도 붉은 얼굴이
더위에 잔뜩 상기 된 채
고개를 꺾어,
앞가슴이 땀으로 흥건한
내 모습을 힘겹게
돌아다보며 그나마
살포시 예쁜 미소를
지어 보여 더 좋다.
수십 세월에 걸쳐
거부할 수 없는
쳇바퀴처럼
한여름 태양에
삶을 달구고,
한겨울 북풍한설에
인간사 세상만사의
끊임 없는 담금질이
거듭되는 동안,
어느덧
육신은 성장과
부식을 동반한 채
한정 된 삶의
종착역을 향하여
죽음의 늪 권역에
진입함을 알리 듯
빈번히 일어나는,
죽음과의
맞닥뜨림 앞에,
무엇인가
특정할 수 없는
슬픔과 설움,
무엇인지
끄집어낼 수 없는
심리적 우울감이
여린 영혼에
적잖은 부담으로
억압 되어진 때,
어딘가에 기대
그 슬픔을
덜어낼 수 있었으면,
누군가로부터
그 울적함을
풀어낼 수 있었더라면
했던 기억을 상기하며,
수일 전
영구아우의 매제께서
갑자기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아내로부터
전해 듣고,
조문을 못 했던 터라
위로 겸 안부 통화와 함께
시간이 웬만 함 만나서
설움 찼을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며
위로하고자 했었음이
여건이
여의치 않았던 관계로
잠시 미뤄 뒀던 것인데,
오늘에서야,
매주일 오후면
용마산이나
아차산에 있음을
잘 아는 아우께서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용마산을 서성이다
전화를 했었던 것,
혹시 아우께서
예전의 나처럼
서글픈 영혼이
죽음으로부터
억압 당한 채,
심적 우울감에
사로잡혀
번민하는 중이라면,
먼저 경험한 형으로서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주저하며
잠시라도 시간 끌
하등의 거리낌도
없었기에
망서릴 틈 없이
기꺼이 달려가,
우선 먼저 안아 다독이고
힘들었을 그동안을
따뜻이 위로하며
죽음이라는 늪 속으로
함께 빠져들어
죽음이라는 인식을
새로이 함께 하며,
커가는 설움 삭이고
깊어가는 울적함
함께 달래고 나누다
그 곳으부터 함께 손잡고
의연히 뚜벅뚜벅
걸어나와 주어야
형이지 않겠는가?
약속한 15분 보다
거의 두 배를 훨씬
더 넘기고 나서야
용마산 몬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우를 만나 반가히
악수를 나누고,
서로의 표정을 살핀 후
아차산을 향해 가는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여유롭게
산행을 이어간다.
가벼운 일상의
대화를 시작으로
가족과 주변의
안부를 서로
묻기도 하며 한동안
가볍고 여유스럽게
등산로에 걸음을
맡긴 채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용마산으로부터
아차산 4보루를 거쳐
3보루를 지나
대성암 인근 까지 접근,
대성암 뒤 암반
예전부터 가끔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어 주곤 했던
덕소와 팔당대교
방향을 조망하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고 앉아
준비한 고량주 한 병과
과일 몇 개를 꺼내
잔을 나눈 후,
진지한 표정으로
고독했을 아우의
속내에 넌지시
위로를 전하며
먼저 내면의 문을
살며시 열며 운을 뗀다.
불과 두 달 전
나의 도움 요청으로
만호형의 초상에
운구를 도왔던 직후,
갑자기
아우의 고모님께서
돌아가셔 엉겁결에
장례를 치뤘는데
마음 추스릴 틈도 없이
매제께서 예기치 않은
사고사를 당한 바람에
두 달여 사이
죽음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불행이 한꺼번에
닥치게 되더라는,
근간의 상황으로
장례 절차 및
그 뒷 수습에
직접 관여하여
마음을 쓰다 보니,
이제야 다소 좀
틈이 나게 된 것이라며,
아직도 뭔가 허탈하고
선뜻 믿기지가 않아
삶과 죽음에 대한
혼란스러움과,
그 충격으로 인한
피로감이 여전히
심리적 부담으로
가시지 않은 채
삶에 대한 의욕이
완전 바닥이라는 점을
고백하듯이
이야기를 잇는
아우의 담담한 표정을
안쓰럽게 지켜보면서,
문득
5~6년 전
2017년 3월에
내 어머니의
귀천길을
살펴드린 이후,
10월 한 달 사이
의형인 종원형과
친인척처럼 가깝고
다정했던 경태 모친까지
앞다퉈 이 세상을
떠나 가시는 바람에
한동안
슬픔과 설움으로부터
헤어나지를 못하고
꽤 오랜 동안
우울한 시간에
갇혀 지냈던 그 때를
기억하며,
서로 함께
마음을 털어 교감하고
공감과 동감으로
위안을 얻어 가는
제법 오랜 시간을
죽음에 관한 생각과
견해를 가감 없이
나누고 이야기 하는 동안,
슬픔과 아픔과
설움 등이 다소 좀
목구녕 밖으로
배출된 듯한 가벼움을
함께 나누며,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이들 중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죽음은 곧
피할 수 없는
개개인의 정해진
운명이며
숙명인 것처럼,
가는 이의 애통함은
차치하고라도
남은 이 한테는
피치 못할
영원한 이별이며
그 한 번으로
영영 끝이라는
사실에
더 황망하고
애통한 슬픔이자
늘
그리움을 동반한
애절한 아픔인
것이라고,
그렇지만 언제나
그 아픔과 슬픔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또한
남은 자의
몫이라는 사실에
서로 동감하며,
우린
작은 한병의 독한 술이
식도를 거쳐 위장까지
뜨겁게 달아 올랐다
식을 때까지 대화에
빠져있는 동안,
어느덧
한여름 열기 가득한
아차산에
어둠이 내리고
인적 끊긴
대성암에는
짙은 적막이
세상사 인생사 허물을
침묵으로 감싸 안는다.
죽는다는 것은,
이승으로부터
맺어진
모든 인연과의
끝이고 종결이며
소멸인 것,
남은 이 에게는
돌이키지 못 할
단 한번의
이별이며
상실이고,
스스로 감당할
슬픔과 아픔과
고독인 것,
세월 깊을수록
그리움과 추억으로
이따금씩
되살아나는
것이지만,
그나마 그 세월에
서서히 조금씩
놔 보내 주어야만
남은 이가 사는 것.
떠나는 이 에게는
딱 그 만큼의
주어진 몫인 것이며
소명일 것이고,
어쩌면
또다른 영역으로의
환생 내지는
천상의 고향을 향한
아름다운 최후의
비상일 것이며,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예외 없이
공평히 주어지는
단 한번의 기회이자
마지막
축복인 것 임을-----.
우린
죽움의 늪으로부터
뚜벅뚜벅 걸어 나와
대성암울 지나
아차산을 빠져나오며,
한결 가볍고
가뿐한 마음으로
저녁식사 계획을
차후로 미뤄둔 채,
지하철 속으로
사뿐히 잠입
삶의 격전지
도심 속에 섞인다.
2022년 7월 24일
삶의 이야기/특별한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