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시골 농촌
자그마한 촌마을로부터
대한민국 최고의 도시 수도 서울에서
보란 듯이 출세하여 금의환향하리라는
원대한 꿈을 안고,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깊은 한겨울 속 1월 17일
서울행 통일호 야간열차에 홀연히 올라
철퍼덕거리는 열차 소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짙은 어둠 속 찬바람이 휘청거리는
차창 밖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서울을 온통 들었다 놨다,
빌딩 수 채를 지었다 부쉈다,
꿈과 현실 사이를 수도 없이 넘나들며
온갖 깊은 상념으로부터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불안·초조
하는 동안 어둠을 가르며 밤새워
질주를 거듭하던 열차가
영등포역임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자,
전장에 나가는 전사의 심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차가 멎자마자
플랫폼에 내린 길 바쁜 사람들의
꽁무니를 쫓아 서둘러 역사를 빠져나오며,
희뿌연 안갯속 가로등마저 졸고 있는
생면부지의 땅 영등포역 광장에 서,
두 눈을 번뜩이며
광장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나서
멀리 두고 떠나 온 고향에는
이제 죽어서나 돌아가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살아남기 위한 결기의
맨땅에 헤딩 질을 시작으로,
독산동을 거쳐
신월동에 거점을 확보하고
광고간판 업계를 부초처럼 떠돌며
생계유지와 기술습득에
전념하는 시기를 한 걸음 한 걸음 지나서
장안동에 정착점을 찍고,
이 거대한 서울 도심 어딘가에
기필코 바늘 기둥 꼽을 만한 나만의
영토를 구축하여 그곳에 확고히
뿌리를 박으리라는 일념으로,
월급 생활에서 일용직으로
일용직에서 하도급을 거쳐 하도급에서
동업과 협업을 줄타기하듯이 오가며
십수 년을 한 우물 파기 끝에 비로소
거금의 대출금까지 들여와
겨우 콩 한 바퀴 구를만한 영토를
마련하고 마침내 내 이름의 땅과
집을 갖춘 명실상부한 서울시민으로서의
자격 취득에 성공하고.
고무된 가능성에 도약과 번영을 꾀하며
이제부터는 내 명의의 간판 가게를
개업하여 스스로 대표가 되겠다는
제2의 목표를 설정한 후,
광고간판업에 대한 폭 넓은 이해와
영업력 확보에 열정을 다하며
존재감을 넓히고 신뢰감 확보에
심혈을 기울이며,
외줄 밧줄에 생명을 의지한 채
시공과 철거의 공정과정을 터득하고
확실한 제작과 참신성 있는
기획(디자인) 능력을 갖춤에
게을리하지 않으며,
열악한 환경 속 동업과 협업으로 인한
어려움과 모진 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견디고 버텨낸
각고의 노력과 준비 끝에
1996년 5월 9일 드디어
대한민국 서울 잠실 모처에 임대를 구한 후,
그 상호를“산 종합기획”이라
이름하고 그 간절함의 결정체였던
가게 즉 나의 간판 가게를
개업하기에 이른다.
그 역사적인 개업 날
지인과 친구와 동료를 비롯한
뜻밖의 주변 많은 분으로부터
진정 어린 축하와 격려를 받으며,
그동안 힘겨웠던 고난의 시간을
한꺼번에 보상받는듯한 기쁨과
뿌듯함으로 가슴이 울컥했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하며, 늘 그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긴장을 유지한 채
성심과 열정을 다했다.
그러한 노력 및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큰 힘이 되었던지 개업 초기부터
기대 이상의 매출 상승을 기록하며
“산 종합기획”으로서의 그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을 계기로,
다양한 거래 라인과 새로운 인연이
오가는 시간의 영속 속에서 생겨나며
스쳐 가기도 또한 가슴에 깊이 자리해
내보내지도 못하는 가슴 시린 인연으로
“산”에 차곡차곡 고스란히 쌓여 남았다.
봉급생활을 전전하다 만난
실내 장식 전문 실장과의
오랜 인연이 계기가 되어,
같이 “산”종합기획의 사무실을 꾸미는데
동참하여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시고
둘이서 뭉쳐 함께 큰 “산”을
만들어 보 자시며 의욕 충만하시던
안 실장 형님,
그러나 무슨 연유로 인테리어 사업은
개시도 못하신 채 많은 궁금증과
의문만을 남겨두고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신
인정 많고 수완 좋으셨던 안형님과,
나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여
자신의 가게를 접고 달려와
힘든 일을 주저하지 않으며
“산”의 비전과 발전을 위해
온 힘과 열성을 다하고자 했던 임형과,
친형제처럼 믿고 따르며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고자 했던
착하고 성실한 상표 아우!!~
위험한 고소 작업 및
밧줄 작업을 전담하여 함께
옥상 난간을 타고 다니며 건물 외벽을
밧줄에 매달린 채 반동을 이용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수평 이동으로
간단히 시공 및 철거작업을
해치우곤 했던 나의 오랜
동료이자 동업자이자 친구인 손형!!~,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지
곡해 줄 상주도 없이 홀연히
천국으로 소환되어간 야속한 인사,
지금도 가끔 그 친구가 그리울 때면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국의 안부를 묻곤 하는
아직도 가슴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가슴 시린 친구!!~,
당시 유명 슈퍼마켓 외부 싸인물과
금융계, 우체국, 농, 축협을 포함한
현금지급기 상부 싸인 및
이미지 광고물 등으로 서울, 경기를
비롯한 전국 등지로 제작에서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전 공정을 자체
소화해내면서 때로는 부산, 영암 등지로
장거리 출장 시공을 다녀오기도 하던
그해 겨울,
임형과 둘이서 부산 다대포항 지점으로
간판 시공을 하러 가다가
엄청난 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악천후를 만나,
시간 지연으로 밤늦은 시각까지
장시간 운전에 긴장이 가중된 나머지
부산 제1부두항 앞에서 정차 중이던
트레일러를 뒤에서 들이받는
대형 교통사고가 난 바람에,
생판 낯선 객지에서
당혹스럽고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봉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당황하지 않고 사고 수습 및
계획했던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해치우고 나서,
이튿날 사고 현장으로 찾아가
지나가는 지게차를 붙들고 사정한 끝에
폐차 직전의 우리 차량을 번쩍
들어 올려 미리서 섭외해 대기 중인
더 큰 트럭에 싣고 서울로 복귀하며,
서로의 팀워크와 돈독한 신뢰감으로
동료 이상의 소중한 가치를 함께 경험한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고 믿음이었던
수진아빠!!~
그 당시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진
사고 소식을 듣고 구세주처럼
사고 현장으로 달려와
사고 수습과 함께 현장 작업 진행에
큰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던
고마운 일곤형!!~
이러한 고운 인연들이
우리의 “산”에, “산 간판집”으로서의
경험과 순발력에 노하우로 축적이 되며
사업실적에 이어 하나의 역사로 남겨져,
“산”으로서의 명실상부한 자리를
갖춰가는 1년여 시간이 원만한
발전 가능성을 시사하며 바쁘고 급히
달음박질치던 1997년 어느 시간 모퉁이,
아~
이 무슨 뜻하지 않는 변고란 말인가?
한 개인도 한 가정도 한 기업도 아닌,
일국의 국가로서의 면모와 자존감이
국가적 채무를 담보하지 못한 채,
그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줄이야.
누군들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처음엔 그저 생소하기만 했던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기억 때문에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IMF라는 외환위기 앞에서,
국가적 경제권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태풍 속에
그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 채,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수많은 가게가 문을 닫고도 모자라
죽음으로까지 내몰렸던 그 처참한
시대적 위기상황 앞에,
제일 먼저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리는 것이 부실화된 금융계였던 터라,
그 태풍은 여지없이 우리 가게“산”에도
큰 위기를 몰고 왔음은 굳이
두말할 나위 없을 엄중한 사실이었기에,
가중되는 여파로 인하여
임형이 먼저 “산”을 떠나고,
상표 아우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산”은 개업 후 겨우 1년여 만에
차츰 위기의 늪 속으로 스멀스멀
빠져들어 가며 뿌리 없는 나무처럼
시들시들 희망과 열정도 함께
식어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름지기
나의 가게를 “산”이라고 이름하였던
그 의미는,
파란 하늘이 그리울 때면
산으로 가고 싶었던 나처럼,
수많은 산 동호인들께서
산으로 가는 그 순수한 마음처럼,
4계절 면면이 다른 모습으로
언제나 변함없는 그 자리에 우뚝 서
누구나 에게 품을 내어주는
묵묵하고 든든한 그
“산”이어야 한다는 여망이었거늘,
늘 신선하고 참신한 정신과
품 넓은 포용력으로
찾아오는 이들께 정성과 성심을 다하여
확고한 신뢰감을 기반한 휴식과 안식과
치유의 장소이고자 했던 내 마음과
정신이 담긴 곳이었기에,
더구나
어떻게 쌓은 “산”인데
이까짓 잠시 지나가는 비바람에
나의 생명과 같은 “산”의 문을 닫고
위기를 피해 숨어 보겠다는 그 자체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자존심의 문제였으므로,
나의 젊음과 패기가 이를 허락지 않았고
그것은 나의 열망과 끈기를 지탱하게 하는
힘과 용기의 원천이 되어,
이보다 더한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털끝만큼의 변함과 좌절은
없을 것이라는 굳건한 자신감으로,
“산”이라는 명맥을 혼자서
이어내며 잠실에서 석촌동으로
석촌동에서 송파동으로
이전을 거듭하면서도
이 어려움도 곧 지나가리라는
진리를 믿어 의심치 않아,
“산”이라는 존재감을 지켜내기에
더 큰 어려움이 없었음을
그나마 감사하게 생각하며,
내가 만들어낸 가게“산”을
기필코 어젠가 본 궤도에 우뚝 세워
그 고운 인연들을 꼭 다시 불러와
기차고 폼나게 그때의 인연을 함께
이어가리라는 일념으로 긴긴 세월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견디고
버티며 지켜왔던 것인데,
이 또 무슨
운명의 걸림돌이란 말인가!!?
지구촌을 위협하며
전 인류에 파국을 예고하듯이
해를 거듭하며 지속된 끈적한
코로나 19 시국의 새로운 위기국면 앞에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난감한 작금에,
긍정하기 싫지만
“산”의 운명이 코로나 19로 인한
열병의 신열을 더는 견뎌내지 못하고
폐문하게 될 지경에 이르러있다는
사실을 냉혹히 절감하고,
IMF의 외환위기 앞에선 그나마
젊음과 패기, 열망과 열정이 있어
견디고 버틸 힘이라도 있었다고는 하나,
그로부터 수 세월이 지난 지금은
58년식 유통기한 만료 임박을 앞둔
해 묶은 연식이고 보니,
이젠 더 이상 버티고 견딜만한
여력마저 방전 직전이라는 사실에
더더욱 슬픔과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며,
이제
나의 삶이자 내 삶의 터전이었던
나의 가게“산”을,
나의 운명처럼
나의 분신처럼 생각하며
내 명운을 걸었던 그 “산”을,
지금껏 25년여 동안을 묵묵히
혼자서 지키고 가꾸며 무한 영광을
꿈꿔왔던 나의 자존감이었기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그곳으로 인한
회의를 품어봤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그러고자 노력했고
그러리라고 있는 힘껏
열정과 근성과 끈기로 버텨내며
내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던
그“산”을,
이제 폐하여 그 이름을 지우려고
이미 마음이 굳어져만 간다는 사실에
더더욱 회한과 아픔을 금치 못하는
잔인한 4월, 서글픈 오늘,
꽃 피워 빛내보지도 못한 채
스스로 허물어 그 이름을
멸해야 한다는 서글픈 운명 앞에,
그저 가슴이 먹먹함과 함께
산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
그 “산”으로 하여금 인연이 된
여러 정겹고 고운 사람들께
죄송함과 송구스러움을
못내 감추지 못하며,
나의 가게 “산”이 흘리는
서글픈 눈물을 애써 훔치며,
나의 슬픔, 나의 눈물과 함께
이제 그 문을 폐하고
“종합기획 산”을
허물어 보내려고 하루에도 몇 번씩
허물었다 뒤집고 또 허물었다 뒤집는
잔인한 4월,
서글픈 4월이 아닐 수 없기에
이 봄,
꽃비와 함께 고운 햇빛 속으로
나의 가게 "산"을 헹가래 쳐 보내는 마음으로
"여성시대 신춘편지 쇼"의 방문을
노크해봅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4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