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슬 퍼렇던 삼청교육대가 엄연히 존재하던
그 역사의 한 모퉁이 에서
세월을 거슬러 1981년,
길고 긴 여름이 꺾일 줄 모르는 열기로
온 대지가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한 여름 한 낮ㅡ
삼청교육이 행하여지고 있는 유격장 현장으로 부터
8~900여 미터 떨어진 유격장 초입ㅡ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홍천군 북방면 굴지리에 소재한
한(?) 초등학교 연병장(운동장)은 전시 체제를 방불케 한
장갑차 두 대가 헤치를 열어 제치고
육중한 m60기관총을 거치한 채 그 위용을 과시하고
발열하는 태양을 피해 학교 주변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여기저기 누워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는,
일상적인 군대 생활에선 보기 드물게 한가롭고 여유 있는
풍경이 연일 계속되고 있는 야전,
그러다가도 갑자기 출동명령이 하달되면
신속한 동작으로 미리 준비된 A군장을 갖추어 메고
총알보다 더 날쌘 동작으로 민첩하게 이동하여
현장 초소로 투입되는 급박한 상황으로 이어지곤 하며,
(아마 피 교육 인들이-그 당시엔 죄수 들 인줄로만 알았음,
-닭장차에 실려 어느 거점에 진입하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 우리 수색대 요원들이 거점 요소요소의
초소에 투입해 의도적인 노출로 그들의 시선을 받게
함으로써 탈출 계획이나 도주로를 미리서 차단하려는 효과와,
장갑차에 기관총을 거치 시키고 그들이 도착하는 바로
코앞에 그 위용을 드러나게 대기시켜 놓음으로써
그들의 기를 꺾고 암묵적인 위협을 가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하려는 계산이 깔려있는 듯 했다.)
위생병 겸 m60 사수 보직을 명받아,
삼청교육대 외곽 경계근무와 야간 매복 근무를 수행하는
동료 부대원들을 지원키 위해 그 당시 여름방학 동안이라
빈 학교를 빌러 야전 막사로 사용하며
파견 생활에 슬슬 재미가 붙어갈 무렵 즈음,
갑자기 야전 위병초소(학교정문)가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초병에 이끌려 체격이 왜소하시고 남루한 옷차림을 하신
할아버지라고 하시기 엔 좀 젊으시고 아저씨라 보기엔 좀
나이가 드신 어르신 한분이 위생병을 찾으신다는 전언에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워서 보니 한 손을 흙과 땀에 절은 수건으로
팔목까지 둘둘 감아쥐시고 하얗게 질리고 주늑 든 표정으로
연신 굽신거리시며 공사장에서 손을 다쳐 병원으로 가시던 중
급한 김에 혹 도움을 좀 받아 볼 수 없을까 하여
오게 됐노라고 하시며 미안스럽고 죄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건너다보고 계셨다.
오욕(?)의 역사를 세월속에 감추고 뼈대만을 겨우 간직한 채 그날을 기억한듯 (2008,4,13)
황급히 구급낭을 챙겨 장갑차에서 훌쩍 내려서며
팔에 감긴 수건을 조심스럽게 풀다 말고
"어흑"!! "어쩌시다 이렇게 크게 다치셨습니까 어르신"?
바른 손인지 왼손인지는 지금 기억으로 분명치는 않지만
손가락 세 개가 으깨어지다시피 되셔서 찢기고 터진 자국에서
피가 솟고 있었다.
이건 너무 상처가 크다 싶어 급하게 군의관님(선임하사관님)을 찾았다.
달려오신 선임하사님께서도
"어이쿠!! 심하게 다치셨네요"!! 하시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살피시며 상태를 묻고 하신 끝에
다행스럽게도 뼈가 다치지는 않으신가 보다고 하시며
얼른 리들(수술용 바늘)을 준비하라신다.
손 빠르게 리들에 봉합사를 꿰서 지혈감자(가위처럼 생긴 핀셋)에
찝어서 드리고, 나 역시 가위를 챙겨 잡았다.
군대 그것도 야전에서 무슨 마취제가 있으랴?!!
맨 땅 바닥에 눕게 하신 후 가까이 지켜보는 동료 병사들께
지원을 요청, 양 팔과 양 다리를 단단히 잡게 하시고
상처에 소독을 하시고 기구 소독을 마치신 후
조금도 망설임 없이 상처를 꿰매가기 시작 하신다.
일그러진 살갗을 당겨 가시며 천 조각을 맞추듯이 잽싸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 말로만 들어왔던 월남전에서의
실전 경험이 여지없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니셨나 싶었다.
맨살에 바느질을 당하셨음에도 아픈 내색은 물론
신음 한마디 없이 그 원시적인 수술을 감내하신 어르신께서
"다 되셨습니다" 라는 말씀에 부스스 일어 나셔서
미소를 지어 보이시는 표정이 얼마나 순박하시고
정감 있게 뵈시던지 안쓰러우시고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울컥하면서 시리고 아팠다.
조심스럽게 정성껏 드레싱을 해 드리며 상처에 덧나지 않게
당분간 손쓰시는 일 없도록 하시고 물 닿지 않으시게
주의하시라 일러 드리고 항생제 몇 알 까지
첩 싸서 드리니 그제야 환한 얼굴이 되시며
축대 쌓는 공사장에서 일 하시다 손이 돌 사이에
끼면서 부딪쳐 사고를 당했다 시며 큰 병원까지 가게 되면
어쩌나 싶으셔서 걱정이 많으셨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큰 도움을 받게 돼서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시며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신다.
선임하사님께서도 현장을 물리시며 부대가 주둔하는 동안
매일 오셔서 치료를 받으시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자릴 뜨신다.
어르신을 위병소 밖까지 따라 나와서 꼭 내일 오셔서
치료를 받으시라는 말씀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어르신을 모셔 드린다.
장갑차 운전을했던 소속이다른 선임동료
2) 삶에 또 하나의 인연이 되고
며칠 째 어르신께서 점심시간 때 맞춰 오셔서
치료를 받으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차츰 정감이 들며 가까운 이웃의 고향 어르신 같은
친밀감이 생겨나게 되면서 어르신께서 사시는 모습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도 급하셨던지 내 나이 다섯 살 때
서둘러 돌아가신 내 아버님 이셨던지라,
부정(父情)에 낯 설은 나 였었기에
괜한 호기심의 발동은 아니었을까 생각도 들지만,
저리 순박하시고 투박하신 어르신의 가정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그 생각을
맘에만 두고 있을 수가 없어졌다.
"어르신 제가 어르신 댁을 한번 가보고 싶은데요"
"괜찮겠습니까!!?" 라고 여쭈자
"아이쿠!!~ 그러면야 감사하지요!!~라는 말씀에,
민가에 내려가서 민폐 끼치는 일이 추호도 없도록 하라 시는
대대장님의 엄명이 계셨지만 선임하사님의 묵인 하에
구급낭을 감춰 메고 몰래몰래 저녁 시간대에
민가를 찾아 나섰다.
어르신의 일러주신 말씀대로 골목길을 지나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자 상상 속과 비슷한 집이 나타났다.
인기척을 보내자 기다리셨다는 듯 불을 켜 주시며
마루로 나오셔서 반겨주신다.
반질반질 마룻바닥이 반짝거리고 아주 낮고
자그마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르신의 부인인 듯한 분과
컴컴한 불 빛 인데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하여
예쁘고 귀염스러운 중 1,2년생 정도의 소녀가
부끄러운 듯 몸을 숨기며 몹시 신기하다는 듯
의아스럽고 흥미로운 표정을 하고 훔쳐보기 바쁘다.
낯설지만 왠지 모를 편안한 마음으로 어르신의 상처를
잘 치료해서 다시 붕대를 감아 드리고, 한 가정의
아버지란 자리 아버지란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 하면서
내 고향 집과는 사뭇 다른 낮고 낡은 집이지만
마루가 반들거리고, 있어야할 자리에 뭔가 빈틈없이
꽉 차 있는 듯한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느낌의
어르신 댁을 빠져 나와 흐뭇한 마음으로 막사로 돌아왔다.
이후 틈나는 대로 민가 어르신 댁을 들랑거리며
치료를 거듭하는 동안, 가끔은 스무 살 쯤 돼 보이는
숙녀 분께서 웃음 띈 얼굴을 하고서 수줍은 듯 눈
인사를 건네곤 했는데 따님인가 하고
짐작만 하고 있을 즈음, 어르신의 상처도 거의
완치가 되셨고 삼청교육도 대 단원의 막이 내리면서
남은 피교육생 들은 전방고지 벙커 작업을 하는데
동원이 될 거 라는 소문만 무성한 가운데
우리도 복귀를 서두르게 되었다.
퇴각하기 한 두 일 전쯤 어르신 댁을 찾아가
머잖아 곧 부대가 철수 할 거라고 말씀을 드리고
그 동안 친척처럼 정이 들었었는데 아쉽고
섭섭한 마음을 전해 드리자
깜짝 놀라시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면 서운해서 어떻게 해요?!"
그동안 너무 큰 은혜를 입었는데 보답할 시간도
없겠다 시며 당장 내일 저녁 식사를 대접하시겠다고
꼭 들러주기를 신신당부하신다.
거절하기도 그렇고 그냥 헤어지기는 더 아쉽고 하여
이튿날 장갑차 운전병(소속이 다른 선임)을 대동하고
어르신 댁을 찾았다. 사립문 앞에 이르자
입맛을 돋우는 닭백숙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반가이 맞아주시는 어르신의 이끌림에 방으로 들어서니
아주머니와 예쁜 소녀와 그리고 가끔 보였던 숙녀 분 까지
우릴 반겨 주신다. 그때서야 인사를 하시며 어르신의
따님이란 소개와 함께 눈인사를 나누었다.
듬직한 사위 놈한테나 아낌없이 내어 주셨을 크고
살찐 씨암탉을 먹음직스럽게 삶으셔서 다리를 쭈욱 찢어
한 다리씩을 건네주시며 그동안 맘에만 두고 계셨던
어르신의 속내를 꺼내 놓으시며 연신 고맙고
감사하다 시며 구수한 옥수수와 함께
이것저것을 우리 앞으로 내 밀어주신다.
얼마 만에 맛보는 기름진 토종닭이며 고향 맛이란 말인가?
얼마나 그리웠던 가족 품 같은 따뜻함이고 편안함이란 말인가?!!
양껏 배를 채우고 훈훈한 정으로 가슴을 메꾸고 나니
만사가 부러울 것 없고 만사가 여유롭고 평안하기만 하다.
참으로 우연찮은 곳에서 군생활로 까칠해진 마음을
위로받고 나니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며,
나로 인하여 이 분들께 뭐든 무슨 일이든 도움을
드릴만한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어,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시면 도움을 드릴 수는 알 수 없겠지만
아무튼 연락이라도 주십사 하며 주소를 남겨 드린 후,
흐뭇한 마음으로 선임 동료와 막사로 돌아왔다.
그런 얼마 후 우린 예정대로 부대로 복귀를 했다.
유격장 행정반
뼈저리게 극복한 사람만이 이해 할 수 있다는 수색대 생활!
정신없이 뛰고 쏘고 침투 매복에 도피 및 탈출!!~
그야말로 대소변도 못 가릴 숨 가쁜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춘천에서"라는 주소가 깨알처럼 적힌 편지 한통을 받는다.
"웬 춘천??"하고 편지를 뜯고 난 후에야 그 어르신 댁
따님의 숙녀 분 성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자신의 아버지를 성심으로 치료를 한데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은 감사편지 였음을 알았다.
반가움과 기쁜 마음에 나 또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정성을 들여 답장을 보냈는데
연 이어 그녀의 편지가 꼬리를 물듯 전해진다.
쉴 틈 없이 전해오는 그녀의 편지가
고단한 군 일상이 설렘과 기다림 속에서
힘든 줄 모르고 일주일을 하루처럼 급히 보내는
신나고 가슴 벅찬 일과가 되어갔다.
때로는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가끔은 자신의 내면적인 생각을,
하루가 멀다며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을 글을 통하여 나누며
차츰차츰 서로를 깊이 있게 알아가는 시간 속에서
그리움이 새록새록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어느날,
부대가 대대로 사각편제가 되면서 난 교육계 겸
위생병 보직을 부여받고 그토록 고대하며 꿈에 그리던
유격장(굴지리)으로 파견 명을 받는다.
물론 그 숙녀 분께도 그 사실은 곧장 글로 전했고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서로에게 얼마나 설레고
큰 즐거움 이었던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더군다나 유격장 교육계의 보직이라 하면
감히 그 끗발을 어느 누군들 건드려나 볼까?!!
그 꿈같은 유격장 생활은 나의 기대에 조금도 부족함 없는
대단한 것임을 날이 갈수록 실감케 되었다.
그녀는 춘천에서 굴지리를 오가며 면회를 가도 되겠느냐?
가까이서 얼굴 바라보며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만나기를 조르고 재촉 해왔지만,
당시 유격장은 교육 시작을 바짝 목전에 두고 교장
보수작업은 물론, 각 단계별 교장 안내판과 안전수칙
페인트 작업에 안간힘을 쓰며, 야간엔 유격교육
업무파악에 촌각을 다투는 상황 이었던지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막상 만나서 가까워지다 보면 어쩜 맘 약한 내 쪽이
먼저 더 견디기 힘들어질 것만 같은 샌님기질이 발동되면서
복잡하게 머릿속이 꼬여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편지를 쓰는 시간이 뜸해지며 다소 소강상태가
지속이 되자 그녀로선 듣고 싶은 대답을 자꾸만 피해간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당시 유격장으로 출 퇴근 하며
지역방위 근무를 하던 오빠들을 통하여 애타는 생각을
전하여 오곤 하더니 언젠가는 자신과 내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출처 모를 황당하고 당혹스런 소문이 전해져 오기도 했다.
순간 냉정을 되찾으며 이래선 안 되겠구나 싶어 그 친구들과
그녀의 사촌 오빠께(당시 지역방위 근무 중)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녀에겐 장문의 편지를 써서 상황을 이해시켰다.
이후 다소 차츰 소문은 진정되고 편지 왕래는 계속 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찌 그리도 무정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에 가슴이 묵직해 옴을 외면치 못한다.
숙맥인지 목석인지 좀 들 떨어진 맹한 놈이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지금의 아내에 대한 충성심(?) 내지는
그녀에 대한 나름의 예의와 존중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애써 위안을 삼는다.
자화자찬 인듯하여 부끄럽기도 하지만,
지금의 아내를 이미 색싯감으로 점을 찍고 난 이후였으니
그녀의 진심을 내 마음에 받아들일 또 다른 마음의 공간을
허락한다는 사실이 내겐 너무 큰 부담 이었고,
스스로를 거역 할 수 없었던 내 자신만의 양심 관 내지는
도덕관에 결코 스스로가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는 추측을
해 볼 따름이다.
찢어질듯 한 목소리로 자지러질 듯 질러대는 피 끓는
젊은 영혼들의 함성이 산을 뒤흔들고 수심이 시퍼렇던
강바닥을 허우적거리며 온통 흙탕물로 뒤집어놓고 난 후에야
겨우 진정이 되는가 싶을 어느 가을 끝에, 하얗게 내려앉은
된서리가 군에서의 마지막 겨울을 예고하며 그
화려했던 유격장에서의 생활은 그 해 겨울의 시작을
끝으로, 어느 날 대대 완편에 의한 자대 복귀 명을 받아
대대본부 작전과에 복귀한다.
이후 밤 낮 없는 차트 업무에 매달려 10개월여를
정신없이 보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냉정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서신을 통한 교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점에
서로 감사하며 나름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씩 잊혀져갈 무렵,
1982년 9월 제대를 몇 칠 앞둔 시점에 이르러
제대를 축하한다는 축하 편지와 함께 자신의 사촌
오빠를 통해 전해오는 제대하는 길에 춘천에서
꼭 한번 만났으면 한다는 전갈을, 그 간곡한 마지막 부탁을,
매정하게 외면한 채, 그동안의 감사와 고마움과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모두 글로 대신하고,
이 곱고 풋풋한 추억만을 가슴에 고이 간직한 채,
환한 미소 지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가겠노라고
좋은 연인 만나셔서 부디부디 행복하시고
진심으로 그대께 행운과 행복을 축원하겠다는
마지막 편지를 우편함에 넣고 모질게 돌아서서
홀연히 고향 앞으로 와버리고 말았으니---------
산악교장에서 어느 한 때
3) 내 가슴에 가시가 되어 추억 속에 갇혀버린 그 사람
귀 밑 머리에 하얗게 세월이 내려앉고
십 수 년 세월이 켜켜이 쌓여 가건만
가슴 한쪽 깊은 곳에 가둬두고 산 추억이,
요즘 들어 이따금씩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나 살기에 바빠 모른 척 외면한 척 잊고 살았지만
그 추억 이렇게 감추고 살기엔
이제 너무 버거워진 탓 인지!?.
그 추억에 남은 미련 때문일까!!?
그 애틋한 청을 들어주지 못했던 죄스러움 때문일까?
그도 저도 아닌 평범한 중년의 고독함 때문인가?
흔하디흔한 중년의 끈적함은 아닌지?
"보고 싶다!!"
"이젠!!" 허전한 중년의 고독함 이라 해도 좋고,
거창한 이유를 빌려 스스로를 정당화 하지 못할
궁색한 변명이라 해도 좋다.
다 하지 못한 미련이 그리워 나 이제 그대가
보고 싶노 라고 한다면 그래도 이 나이에 쪼끔은
로맨틱 하지 아니한가?
중년의 망령이라 한들 억울해 할 수도 없겠지만
그대 옛날 나 보고 싶었듯이
나 그대가 이제 보고 싶다 한다면
그대 옛날 매정했던 나처럼 세월 다 지난 중년에
이 무슨 끈적거림 인가고 내친다 한들 원망도 못할 처지지만
이제 와서 그 사람 그대를 추억하며 그리움을 품는다면
내 감정만 챙기고 사는 이기적인 인간이라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비록 그대 손 한번 잡아본 적 없고
얼굴 마주 대하고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그대지만
어느 하늘아래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이제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찻잔 마주하고 옛 애인을 만나듯 한 설렘으로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는
너무 호화스럽다거나 또는 부정스럽다 시면
먼발치에서라도 스쳐가는 이방인처럼 휙 지나가는
그대의 옆모습, 아니 뒷모습이라도
이제 꼭 한번 보고 싶습니다.
내 지금의 아내를 만나 아이들 낳고 행복한 가정
이루며 잘 살고 있듯이 그 여인 또한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가정 이루시고 곱고 아름다웠던 옛 모습 간직 한 채
자신의 삶에 행복해 하는 여인이라시면 더 좋겠습니다.
나처럼 이따금씩 그대 이름 기억하며
가끔씩 아주 드물게 내 이름 추억하고
엷은 미소 감추며 살아가는 그대라시면
더 없는 행복이고 축복이겠습니다.
겹겹이 도배 된 세월 속에 내 가슴에 가시가 되어
추억 속에 갇혀버린
"그 사람" 지HS여!!~